저는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됩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와 함께 길을 다니면 아이들이‘저 아줌마는 왜 이렇게 키가 작아?’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어른들한테는 엄마가 아이취급을 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내가 어렸을 때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커가면서 우리엄마 키가 많이 작은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제가 키가 작아서 엄마가 커보였고, 밖에서 엄마가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니시기 때문에 그렇게 작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커가면서 제가 엄마 키를 넘어가고 많은 사람들과 비교해봤을 때는 우리 엄마가 작다고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키 번호로 서라고 하면 앞에 섰지만, 그다지 불편함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키 번호가 초등학교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다른 애들이랑 차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키 번호로 따지면 뒤에서 있는 애들이랑 많이 놀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키에 대한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유전자가 뭐고 유전이 뭔지 몰라서 저도 키가 엄마처럼 작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엄마가 송해룡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저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일단 따라가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송해룡 교수님으로부터 142cm밖에 클 수 없다는 말을 듣고도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지금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는데, 꼭 해야되나’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키가 작아서 겪은 고통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키가 작으면 안 좋은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교수님의 말을 듣기에는‘링을 차고 6개월이면 된다.’고 말씀을 하셔서 쉽게 생각을 하고 수술울 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수술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입원하면 엄마가 해달라는 대로 다해주셔서 좋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기뻤던 게 뭐냐면, 핸드폰을 산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사고 싶었던 핸드폰을 사고 나서는‘수술한 다음에 얼마나 아플까?’라는 생각은 다 없어졌고, 오로지 원하는 것을 사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바로 친구들에게 핸드폰 샀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날 엄마는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토요일날 입원을 해서 갈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 안가는 게 싫어서 일단 내일 학교에 가고 학교 끝나고 입원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많은 선물 공책을 꾸며서 편지를 일일이 쓴 것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준비해온 게 없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이랑 헤어지는 게 싫었지만 그래도 저는 입원하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 입원절차를 다 마치고 병원을 갔는데, 저 혼자 있는 병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6인실이었습니다. 일단 병실로 올라갔는데, 처음 와 본게 아니라 두 번째인데도 어색하고 주변이 많이 변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실을 둘러봤는데 다 할머니들뿐이고 왠지 할머니들이 까칠할 거 같고 간병을 하는 아주머니들도 다 아줌마여서 싫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밤에 엑스레이를 찍고, 스포츠의학실에 가서 여러 가지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는데, 저는 왜 이걸 찍어야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밤에 병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직 10시밖에 안됐는데도 불구하고 복도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의사 선생님들이랑 간호사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병실로 들어가는데 불이 다 꺼져 있어서 TV를 볼 수도 없어서 불편했습니다. 지금이면 집에서는 컴퓨터를 하고 TV를 볼 시간인데 심심하기도 하고 할게 없어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오고 결국 엄마에게 밖에 나가자고 해서 12시에 들어오고 그랬습니다.
그 다음날 수술이 이틀 남았을 때 저는 그걸 신경도 안 쓰고 있었습니다. 링거를 맞는 그 시간이 저는 수술에 대한 두려움보다 컸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혈관이 안보여서 몇 번식 찌르는 게 기본이기 때문에 맞기 싫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링거를 들고 와서 주사를 찌르고, 고무줄로 팔을 묶고 그래도 안 되니깐 몇 번 때리고도 안 되니깐, 다른 팔로 옮겨서 일단 꽂고, 그래도 안 되서 다시 찌르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야 피가 나옵니다. 피가 보일 때는 뭐랄까? ‘기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제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저는 할게 없지만 엄마는 바쁘셨습니다. TV는 할머니들이 보니깐 아침마당 이런 것들만 봐서 재미도 없었고, 그러다가 음악치료와 미술치료를 하는 남촌드림클래스 선생님이 나보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다고 권해서 컴퓨터프로그램을 받아봤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수술 전날
전 그때가 제일 고통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날 처음으로 수술한 사람을 봤습니다. 링 같은걸 끼고 있어서 징그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걸 내가 낀다니! 그때 처음으로 수술이 싫고 무서워졌습니다. 그래도 엄마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수술 당일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마취가 풀리고 정신을 차린 다음 날, 제 다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허벅지가 2배나 커져 있었고, 만져보니 쇠 같은 게 있었습니다. 소변도 혼자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리가 조금 욱신거리고, 아직은 걸을 수 없다는 것 빼고는 수술 전하고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꼈습니다.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게 되었을 때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간병인 선생님 덕분에 쉽게 탈 수 있었습니다. 처음 타보는 휠체어라 운전이 서툴렀습니다.
화를 참고 좋은 말로 나를 운동시키느라 힘들었을 엄마
소독을 처음 했을 때는 정말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고, 옆에 계셨던 엄마도 같이 울었습니다. 스포츠의학실로 운동을 다녔습니다. 거기서는 무릎을 구부리거나, 발목이나 인대를 늘리는 운동을 했습니다. 아프진 않았는데 거기서 섰을 때는 핀에서 피가 나와 놀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스포츠의학실로 가 운동을 하고, 병실로 올라와 다른 운동을 조금씩 해야 했는데, 게을리 했더니 나중에는 문제가 되어 다리에서 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꾸준한 운동이 중요하단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겠다고 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퇴원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퇴원 후, 집에서는 대변 볼 때만 움직였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아 엄마의 잔소리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복지관에서 운동을 도와준다하여, 일주일에 두 번은 그곳으로 가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에는 외출이 힘들어 가질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6학년 때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유급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일단 휠체어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교실이 3층이라 이동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할 수 있는 무지개학교를 다녀, 출석일수를 인정받았습니다.
까치발 수술
저는 운동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아 까치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10cm 이상을 늘릴 경우, 까치발 수술은 필수라 하지만 저는 10cm를 늘리지도 않았는데 까치발이 된 게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러나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수술 후, 고생을 한건 저보다 엄마였습니다. 저를 신경쓰느라 집안일은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까치발 수술을 하고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집고 다닐 수 있었을 때, 택시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엄마는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싫었지만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생각하며 꾹 참고 타고 다녔습니다.
몸이 힘들다고, 귀찮다고 운동을 게을리 하다가는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시기만 넘기면 다른 아이들처럼 걷고 뛰고 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