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버지는 배를 타서 고기를 잡는 일을 하십니다. 엄마는 저를 임신했을 때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했는데, 무려 6명이나 되는 고모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남편없이 힘들게 지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배를 탔기 때문에 3년씩 안 들어오는 기간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엄마는 밥을 지금도 잘 안 먹는 스타일입니다. 정신적으로 힘들었기에 그랬는지, 아무튼 그 당시의 환경으로 밥도 잘 못 먹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태어나 한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내가 너무 많이 울어서 병원에 갔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았답니다. 그 당시에 모유를 못 먹고 우유를 먹었는데 우유를 먹으면 코로 나오고 그랬답니다. 그 때에는‘그냥 우니까 그러는가 보다, 먹기 싫어하나 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답니다. 커서도 많이 못 먹고, 키도 크지 않고, 체중미달인 미숙아였습니다. 그러다가 돌쯤 전후로 아는 사람의 아들이 귀에 물이 들어가서 종합검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발음을 똑바로 못하고 옹아리처럼 하는 수준이어서, 그때 저도 도곡동에 있는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종합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목구멍이 크다는 구개열파열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대학병원이라 6개월 넘게 기다려 나이로는 네 살 때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5살 때 다른 병원에서 또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받았지만 언어는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언어교정을 또 3년이나 교육받았으나, 인지능력이나 언어능력은 뒤떨어졌습니다. 유치원 때도 언어교정을 했었는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유치원을 8살까지 다녔고 기간으로 따지면 3년 정도 다녔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말을 제대로 할 때까지 언어교정을 시켜서 저는 초등학교를 남들보다 일 년 늦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시게 되었고, 엎친데덥친 격으로 빚에 시달리게 되어 엄마가 갚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와 언니를 엄마가 보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엄마는 저희 둘을 외가 쪽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는 데로 보냈습니다. 전학을 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지냈는데, 전학을 가고 난 후 저는 외가 쪽 새 학교를 간 후부터 학교나 가정이나 적응을 잘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간 새 학교 애들은 산동네 중 못 사는 동네라서 그런지 지금 생각해보면, 애들이 적응을 잘하고 장난도 잘치고 애들끼리 끈끈한 그런 게 있었습니다. 약간 강한 말씨와, 기세, 뭐 안좋은 게 있음 떠벌리고 하는 그런 성향을 가진 애들이 많았습니다. 숫기가 없고 순진한 저는 당연히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정도가 세졌습니다.
사춘기 때는 남학생한테 잘 보이고 싶어 더 내성적이고 수줍음도 많이 타게 되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저는 적응도 못하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왕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도 할머니의 일처리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외할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갈등도 심해졌고 여유란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6학년 때는 왕따 생활이 심해 싫을 만큼 너무 힘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41번에다가(이때는 태어난 생일로 번호를 매김), 내가 한 학년 빠른 걸 숨기고 싶었지만, 애들이 다 말하고 다녀서 알 사람은 다 아는 게 속상했습니다. 사람들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갈 성격도 못되지만, 저는 더 소극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소극적인 태도, 소극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중학교 올라와서도 키대로 번호를 매겼기 때문에 저는 늘 첫 번째였습니다. 초등학교 때보다는 그나마 애들이랑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진정한 친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같은 짝이 된 애는 키가 165cm 정도 팍 컸는데, 저는 키나 체격이 크질 않아서 너무 속상했습니다. 애들과도 사교적으로 지내질 못하는데다가 더군다나 초등학교 때 동창애들은 내가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한다고 깔보고 쉬는 시간마다 와서 괴롭혔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고 사귀고 싶은 친구를 못 사귀게 분위기를 훼방놓고 그랬습니다. 중학교 일학년 때 제일 심했고 고학년이 가서도 간간히 모이는 일이 생기게 되면 저를 깔보는 식이고 옆 사람을 선동하고 그랬습니다. 집에도 알리지 못하고(그럴 성격이 못되어서) 또 할아버지도 아프시고 엄마랑도 따로 떨어져서 사는 관계로 소통을 잘 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할아버지도 전혀 교육을 안 시켜주고 저도 그럴 마음도 없었던 것 같고(정확히 말해서 잘 모르고 멍청하게 지냈음)해서 제가 많이 엇나가고 엇나갔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로 제 과거를 숨기고 싶어하고, 친구랑도 못 사귀고 학교생활도 너무 따라가기 벅차고 무용 같은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자퇴하려고 했지만 저희 집 형편상 그러지도 못하고 힘들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더군다나 이상향과 너무 떨어지고 제가 바라는 인간관계가 안 되고, 제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말도 못하고, 이때까지도 우리 가족이 너무 힘들었던 걸 알고 있었기에 너무 비참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장판 검사를 받았는데, 닫혔다는 말을 듣고 너무 절망감에 빠지고 무기력해지고 더 나빠졌습니다.
대학교 와서도 사귀고 싶던 친구랑도 못 사귀고 있었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인터넷으로 TV로 소일하면서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하는 시간도 늘어나고 사람들 연애하는 거 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지고 그랬었습니다. 어쨋든 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대로라‘이따가 크겠지’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더 이상 클 수 없다는 말에 세상 모두가 원망스럽고 싫고 부정적인 사고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인터넷을 많이 접하게 된 나는, 엄마한테 대학교 시절 그냥 지나가는 말로 키 수술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는 키 수술을 하자고 해서 얼떨결에 가장 좋다는 고려대학교구로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보험적용이 되어 수술 예약날짜를 잡고 몇 개월 후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은 8~9시간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다리가 튼튼해서 그런지 수술 후에도 전혀 아프지 않았고 폐가 쪼그라지지 않기 위해 풍선을 부는 건, 물도 못 먹고 해서 힘들었습니다. 그러고 일주일 정도 처음 병원 화장실 갈 때도 제가 걸어서 갈 만큼 상태도 좋았고 연습도 많이 해서 2주일 정도 후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 좋았습니다.
부산 집에 오니 거리도 멀어 병원에 자주 못 가게 될 뿐 아니라 전에 잘 걸었으니까 나중에 잘 걷겠지 하고 방심했던 것 같습니다. 화장실 가는 데만 2분도 안 걸리던 거리를 40분이나 걸리고 ,식욕도 떨어지고 밥 먹기도 싫어졌고 너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감당이 안됐습니다. 그래서 다 늘리고 재활을 하고, 빨리 끝내자는 생각으로 연습을 안했더니 결국 인대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잘못했던 게 자책감이 들었고 옆에서 꼼꼼하게 체크하지 못한 엄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병원에 가기 싫었고 인터넷에서도 수술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부모님이 하자고 해서 결국 한 것이 아닌가 해서 너무 싫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만약에 못 걷는다면 인대수술을 해야한다고 자세하게 안 알려주고 운동만 열심히 하라고 그러기만 하고, 집에서도 너무 혼자라서 우울증 걸리고 거기다가 원하지 않는 골수를 빼서 다리에 이식하는 바람에 이상하게 흉터가 나서 보기 싫은 게 그게 제일 싫었습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할 때 저랑 충분히 상의를 하여 흉터가 남는다고 하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되는데, 부모님하고만 상의를 하고 끝내서 나중에 통보식으로 알게 된 저는 너무 속상하고 우울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또 그런 모습으로 밖에 나가기도 싫고 운동도 하기 싫어서 차라리 빨리 끝내고 아픈 거 보다는 늦게늦게 해서 덜 아프자는 생각으로 천천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피곤하게 살아왔는데,‘넌 그런 애야’라고 자꾸 과거를 지적하고 미래를 지적당하는 것 같아서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또 평소에도 전혀 운동을 하지 않았고 아픈 거는 보지도 않고 잊고 지내는 편이라 현재를 인식하고 재활운동하기가 너무 버겁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맛있는 거 먹고 시간적인 여유도 많고 해서 시간을 가지며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생각을 하고 또 과거에 힘들었던 것들을 조금씩 잊어가면서 치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안 좋았으니까 앞으로 잘되고 싶은 마음에서 더 의지를 굳건히 하고 노력해야겠습니다.